Profil de 辉东2月7日,新的开始~~PhotosBlogListes Outils A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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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006

<<我的哥哥>>

       今天看了一部元斌主演的<<我的哥哥>>.哥哥天生就是个"兔唇",爸爸试图将他抛弃,却被妈妈重新捡了回来.爸爸就在弟弟出生前夕死去,妈妈却只为了能给哥哥作手术四处奔波.弟弟一直以为妈妈只喜欢哥哥,同样是便当,哥哥的总会比弟弟的丰盛的多.从小到大,弟弟没穿过一件像样的衣服.......就着样,渐渐的,哥哥成了谦虚的,懂事的,成绩优秀的好学生,而弟弟却成了暴躁的,不爱学习的,整天打架的学校的小霸王.但是有一点始终没变,哥哥的嘴还是那样,还是不敢跟别人说话,弟弟还是瞧不起哥哥,还是时不时的欺负哥哥.转眼,哥哥考上了汉城大学,妈妈为了供哥哥学费,投资房地产,结果被骗........结果弟弟为了养家,不小心步入了歧途..........哥哥回家探母............弟弟和妈妈吵架,妈妈冤枉了弟弟,结果弟弟把怒气全都撒在了邻居家里,把邻居家的傻子给暴打了一顿.结果,邻居家的小卖铺关门了............其实,弟弟也误解了妈妈,在妈妈眼里,弟弟和哥哥是一样的,只不过因为哥哥是残疾,所以一时间故不料弟弟而已.........误会没了,家庭和睦了,弟弟也准备推出暴力团伙了,结果,弟弟被暴力团伙打了一顿,正当影片迈向结局的时候,意外发生了,哥哥在雨中被邻居家的傻子给打死了,原因很简单.哥哥穿的正是那天弟弟穿过的衣服................... 
09/02/2006

不灭的李舜臣

李舜臣(1545-1598),朝鲜著名民族英雄,抗倭爱国名将,杰出的军事谋略家。在壬辰卫国战争中,他运用出色的军事战略,指挥朝鲜海军多次击败入侵的日本海军,取得了一系列海上作战的胜利,为整个卫国战争的最后胜利做出了重大贡献。

  从1591年起,日本就积极着手进行侵朝战争的各项准备。李舜臣在国家危难之时,承命于全罗左道水军节度使这一海军要职。李舜臣到职后,即竭尽全力加强海军建设,做好反侵略战争的准备。他着重抓了整顿军队和改制武器两件事。在整顿军队方面,他吸收了朝鲜海军的优良传统及外国的先进经验,对所属海军的战斗编队、战略战术、进行了改革;并加强了对部队的爱国主义教育,使指战员都成为忠于祖国、英勇善战的勇士。先进的武器是克敌制胜的重要因素。为了提高朝鲜海军的战斗力,李舜臣还对“龟船”进行了改造。改进后的“龟船”长10余丈,宽1丈多,船身及上面的“龟壳”用硬木制作,包上铁板,敌人炮火不易伤害它。铁板上还装有密集的铁钉,使敌人在接舷战时无法攀登。船头有一个大龙头,上设两个炮眼,在行进中船内可焚烧硫磺等物,烟从龙口喷出,可以起到隐蔽自己,迷惑敌人的作用。船身四周凿有很多炮眼枪眼,便于士兵在船内敌人发射火力。同时,船的两侧各有10面船浆,战斗时一齐划动,航行飞快,进退自如。加大后的船体可多存淡水、粮食,适合长时间、远距离航行。经李舜臣改造后的龟船马上投入成批生产,在以后的壬辰卫国战争中发挥了巨大作用。

  1592年4月,日本侵略者以陆军的优势兵力在朝鲜釜山登陆,同时以强大的舰队配合陆军行动。李舜臣指挥朝鲜水师奋起抗击,屡挫日本海军,牢牢地控制着制海权,迟滞了日本陆军的进攻速度。

  5月上旬,李舜臣水师与日本海军在玉浦洋面上展开激战。当时,日军傲气十足,不把朝鲜水师放在眼里,在玉浦港的日本战船上的大部分水兵一登岸,便进村庄抢劫去了。李舜臣乘敌不备,率85艘舰船隐蔽疾驶,直扑玉浦港,当即击沉、烧毁敌舰26艘,当晚又击沉击毁敌舰18艘,朝鲜水师仅一人负伤。

  从5月底到6月上旬,李舜臣又指挥了唐浦战役。5月29日,李舜臣率领备龟船的23艘战舰,与元均指挥的水师会合,准备向泗川洋面的日军阵地发动进攻。到达预定地点时,李舜臣发现敌占据的地形险要,不利攻击,便随机应变,采取以退为进的战术,诱敌出港,准备在洋面上歼灭敌人。日本海军见朝鲜海军不战而退,误以为是胆怯,即全力追击。待敌追至对朝鲜水师有利的海域时,李舜臣出其不意地转退为进,以“龟船”充当先锋,冲入敌阵,左冲右撞,往来穿梭,同时发射各种火炮,将敌舰撞破或击沉。其它战船也不甘示弱,箭炮齐发,日本舰队大乱。经过一番激战,日军参与追击的全部舰船不是被击沉就是被缴获。6月2日,李舜臣率舰队进攻唐浦敌军,令龟船冲向敌旗舰并将其撞破,同时纵火将在唐浦的21艘敌舰全部烧毁。6月5日,李舜臣与李仁祺部,采取诱敌出洋,前后夹攻的战术,又烧毁敌舰26艘。7月,朝鲜水师在闲山岛海战中击毁敌舰近百艘,一举歼灭敌海军主力。

  为挽回败局,日寇巧施反间计得逞,李舜臣被撤职,致使朝鲜水师几乎全军覆灭,闲山岛大本营被敌人占领。

  这时朝廷迫于国内舆论的强大压力,重新任命李舜臣为三道水师统制使,委以挽救国家危亡的重任。但同时,朝廷认为水师已垮,难以御敌,令李舜臣率部登陆作战。临危受命,再次复出的李舜臣以军事谋略家的眼光洞察形势,认为水师绝不可废。李舜臣以残存的12只战船和120名水兵为基础,首先补充了一部分兵员,抓紧训练,其次重新选择了新的水师基地,李舜臣仔细分析了敌我双方的力量及其它因素。很明显,敌人在兵力上占有绝对优势。我方要取胜,必须借助地利,即利用有利地形打击敌人。8月底,李舜臣指挥朝鲜水师击退前来偷袭的8艘敌舰后,主动撤到地势险要的珍岛碧波亭隐蔽起来。这一带的地势李舜臣是了如指掌的:前有小岛阻拦,港内可以隐藏数十艘战船;更为有利的是这个海域有一条狭窄的通道,即鸣梁海峡。这里每天海潮涨落4次。李舜臣认为这个“阻难狭路”是杀敌好战场。他派人在鸣梁海峡东西两个出口暗设铁索和木桩,目的是要涨潮时驶入的敌舰,退潮时不能驶出,给朝鲜水师提供一个理想的瓮中捉鳖的场所。

  9月16日,日军以330艘战船和2万多人的兵力向朝鲜水师发起进攻,在敌我双方兵力十分悬殊的情况下,李舜臣胸有成竹,沉着应战。他先派出几艘战船进攻敌舰,将大批敌舰引入鸣梁海峡。不久,潮水退落,敌舰被暗设的铁索;木桩所阻,无法驶出。李舜臣即派水师反攻,以12艘战船击沉敌船30多艘,歼敌4000余人。这就是朝鲜历史上著名的“鸣梁大捷”也是世界海军史上以少胜多的光辉战例。

 
07/02/2006

英雄——织田信长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Oda Nobunaga]                     

                                  

1534 일본 오와리 구니[尾張國]~1582. 6. 21 교토[京都].

후지와라 씨[藤原氏] 출신의 무사.

본명은 기치호시[吉法師], 뒤에는 사부로[三郞]라고 했다. 아시카가 바쿠후[足利幕府]를 무너뜨리고 일본 전국의 반 정도를 자신의 지배하에 통일시킴으로써 오랜 봉건전쟁을 종식시켰다. 그는 사실상의 전제군주로서 중앙정부를 안정시키고 전국 통일을 이룰 여건들을 조성했다.

아버지는 재산을 많이 모았으며, 무사 출신의 가신들을 둔 정부관리였다. 1549년 노부나가는 아버지의 영지를 이어받아 친척들과 자신의 구니[國] 내의 주요가문들을 복종시켰다. 1560년경에는 오와리 구니의 모든 영토를 자신의 손 안에 넣음으로써 뛰어난 전략적 재능을 과시했다. 또한 같은 해 인근 지방의 대영주였던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의 대군을 무찌름으로써 일본을 놀라게 했는데, 이로써 그는 일본 통일을 향한 첫발을 내디뎠다. 용감하고 대담하며 전제적인 성격의 노부나가는 바람직한 새 정책들을 재빨리 개발하여 시행했다. 그는 소총부대를 조직한 최초의 다이묘[大名 : 봉건영주]였다. 또한 오와리 평야 중심부에 위치한 나고야[名古屋]의 신흥 상인계급만이 아니라 비옥한 오와리 평야의 농업생산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었다. 이처럼 경제적 토대를 확고히 다짐으로써 그는 교토 주변에서 가장 풍요로운 지역이며 오랫동안 일본 정권의 중심지인 긴키[近畿] 지방에 진출할 계획을 세웠다. 1562년에는 이웃 미카와 구니[三河國]의 유능한 봉건영주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동맹을 맺었다. 이 동맹으로 배후지의 안전을 확보했다고 생각한 그는 1567년 작전기지를 북쪽 기후[岐阜]로 옮겼다. 이듬해에는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를 도와 교토로 진군함으로써 요시아키가 쇼군[將軍]이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원래 요시아키는 자신의 형이자 전임 쇼군[將軍]이었던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義輝]가 암살당하자 쇼군직에 앉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요시아키와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으며 마침내 1573년 그를 폐위시켰다. 비록 명목상으로는 아시카가 바쿠후가 1597년 요시아키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긴 했지만 노부나가의 이같은 행동은 사실상 아시카가 바쿠후의 종말을 의미했다. 1576년 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다지기 위해 노부나가는 수도 근처 비와호[琵琶湖] 주변에 위치한 아즈치[安土]의 거대한 성에 자신의 사령부를 설치했다.

이 사이 노부나가는 통행세와 동업조합에서 걷는 세금을 폐지함으로써 새로운 경제정책을 추진했는데, 이들 세금은 지금까지 지방 다이묘들의 특권적인 수입원천이었다. 또한 자신의 군사력을 강화하는 한편 1571년에는 일본 불교의 한 종파인 천태종(天台宗)의 본산 엔랴쿠사[延歷寺]를 초토화했다. 천태종은 8세기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이래 전통적으로 정치와 종교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또 그 사이 광신적인 잇코 종[一向宗 : 불교의 한 종파]은 지방 소영주들의 충성심을 저버리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세속적 권한을 강화하고, 요시아키를 지원하고 신도들로 하여금 여러 지방의 권세 있는 다이묘들과 손잡게 함으로써, 일본을 통일시키고자 하는 노부나가에 완강히 저항한 잇코잇키[一向一揆 : 잇코의 난]를 일으켰다. 노부나가는 잇코 종과 직접적·간접적으로 10년 이상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1580년에 마침내 노부나가가 잇코 종의 정치적·군사적 중심지인 오사카 혼간 사[本願寺]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황실의 중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부나가는 많은 장원과 사찰 토지를 빼앗았고 이렇게 확보한 토지를 사무라이와 부농들에게 분배함으로써 이들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이로써 확고한 정치적·경제적 기반을 구축했으며 불교사원들이 전통적으로 행사해오던 영향력을 약화시킴으로써 이 기반을 강화했다. 교토에 자리를 잡자 그는 예수회선교사에 대한 보호조치를 확대했으며 수도에 교회를 세우고 아즈치에 신학교를 건립하도록 후원했다. 그의 이러한 조치는 유럽 문화에 대한 관심 때문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장려하는 것이 불교사찰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수단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노부나가는 신자가 아니었으며 그리스도교에 대한 그의 입장은 솔직히 정치적인 것이었다.

1582년 봄이 되자 그는 이미 일본 중부를 석권했고 서일본으로 자신의 지배력을 더욱 확장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해 6월 불만을 품은 한 가신이 일으킨 반란에서 부상을 입었고 자살했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일본의 거의 반을 지배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다이묘들이 지니고 있던 분권적 구(舊)질서를 무너뜨리고 일본의 정치적·경제적 통일에 이르는 기반을 닦았다.

 

 

辉东 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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身在同济...爱交朋友,想交朋友,珍惜朋友......。